The Colors - 色들

JANG SEUNG TAIK

2016-04-05 ~ 2016-05-04

장승택 - 마음의 연금술

Ⅰ.
회화란 무엇인가? 장승택의 작업은 이처럼 소박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그림’을 찾아볼 수 없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을 그림이게 하는’ 회화적 요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그림이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사물(objet)’에 가깝다. 붓질을 하지 않은 ‘사물로서의 회화’가 장승택이 원하는 현대미술 문맥에서의 지평인 것이다.
그는 그 지점을 향해 무려 30여 년이란 세월을 버텨왔다. 여기서 굳이 ‘버텼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의 작업이 세간에서 쏟아지는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는 작업의 줄기를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텅 빈 회화’라고 밖에 달리 부를 수 없는 장승택의 작업은 회화의 본질에 대한 끈질긴 질문으로 점철돼 있다. 비록 그의 작품이 어떤 측면에서는 철지난 모더니스트 회화의 연장선상에서 읽혀지는 수가 있다 하더라도 , 그는 그러한 오해에 굴하지 않고 회화에 대한 실험을 그치지 않고 있다. 이런 그의 회화적 실험의 요체는 다음의 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빛과 색채는 회화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지만, 나의 작업에 있어서 그것들은 반투명한 매체와 함께 절대적 요소가 된다. 증식된 투명한 색채와 빛의 순환에 의한 물성의 구체화를 통한 정신의 드러냄이 내 작업의 진정한 의미이다.”
장승택, <작업 노트> 중에서

이 글 속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바로 ‘정신’이다. 장승택에게 있어서 정신의 의미는 비물질적 실체로서의 그 무엇, 딱히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으나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정신은 그를 사유하는 존재, 다시 말해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주체로서의 존재자임을 각인시킨다. 그의 작업은 따라서 작가가 다름 아닌 감정의 주체로서의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러한 감정의 배설이 다름 아닌 작업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 연유로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정신은 그를 몽상가로 만든다. 그것은 차라리 시(詩)의 영역에 가깝다. 그가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는 바슐라르 식으로 말하면 불꽃의 세계이다.

“불꽃의 몽상가가 불꽃을 향해 말한다면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그는 시인인 것이다.”
알다시피 장승택은 시인이 아니다. 그러나 몽상을 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의 제작 태도는 시인의 태도에 가깝다. 그가 사용하는 압축적인 언어, 작업에 임하는 고도로 절제된 태도, 색이 연상시키는 은유, 재료의 중성성 등이 그의 작업을 시에 가깝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여기서 그의 작업을 가리켜 ‘마음의 연금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사물에 대한 그의 사유는 물리적 사물로서의 재료를 녹여 투명한 물질로 전화(轉化)시키는 직접적 동인이다. 바슐라르가 말한 것처럼, 작가란 결국 자신에 대해 말하는 사람에 다름 아닌 까닭이다. 그리고 작가가 기계가 아닌 이상, 제 아무리 금욕적인 언어로 발언한다고 해도 이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자명한 사실은 작가에게 부여된 영원한 굴레이고 숙명이다.

Ⅱ.
장승택의 작업이 물리적 사물로서의 캔버스의 존재 증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정신을 강조하는 그의 논조에서도 읽혀진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물리적 사물로서의 초기 캔버스 작업 이나 여타의 서구 미니멀 회화와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장승택의 작업은 한국 단색화(Dansaekhwa) 작가들 중에서 행위의 반복을 통해 고유의 정신성을 드러내고자 한 박서보, 이동엽, 정상화, 최병소의 작업 태도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주지하듯이 앞에서 열거한 사람들은 육체적 고행을 통해 정신을 물질 속에 녹여내고자 한 작가들이다. 적어도 ‘정신’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앞서 예로든 1세대 단색화 작가들과 장승택의 작업태도는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그러나 박서보, 정상화, 최병소의 작업이 반복적 행위를 통해 형성된 물질감이 강조되는 반면, 장승택의 그것은 매끄러운 표면을 요체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질감 자체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 그러한가?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재료적 측면이다. 최근 몇 년 간에 걸쳐 장승택이 사용하는 재료는 플랙시글라스이다. 합성수지의 일종인 이 재료는 작가의 요구에 의해 특별히 제작된, 두꺼운 사각 캔버스의 대용으로 사용된 것이다. 두께가 5센티에 이르는 투명한 이 ‘사물(objet)’은 딱딱하게 각이 진 기존의 캔버스와는 달리 모서리 부분이 둥글게 마감된다. 그것은 캔버스라기보다는 오히려 넓고 큰 박스를 연상시킨다.
장승택은 이 넓적한 박스 형태의 사물을 작업대 위에 눕혀놓고 스프레이 건을 사용, 특수 미디엄과 섞여 묽게 희석된 아크릴 물감을 반복적으로 도포(塗布)한다. 이 때 묽은 물감 용액이 평평한 오브제의 옆으로 흘러내려 일련의 자국을 형성하게 되는데, 20여 차례의 반복과정을 거쳐 형성된, 색깔이 서로 다른 물감 용액의 자국은 미묘한 색의 차이를 가져오면서 적층(積層) 효과를 낳게 된다. 장승택은 이 모서리 부분에 매료되었으며, 이를 자기 작업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다.
묽게 갠 물감의 용액이 스프레이 건에 의해 평평한 물체(objet)의 표면에 뿌려질 때, 미세한 물감의 입자들이 사뿐히(그러나 실제로는 공기의 흐름에 따라 아주 천천히, 때로는 춤을 추듯이) 내려앉아 표면에 정착하는 과정을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하나의 색깔이 물체의 표면에 뿌려지고 그것이 건조되는 동안 기다려야 하며, 그렇게 20여 차례에 걸쳐 물감의 도포(塗布)가 반복되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물감의 적층(積層)이 형성되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전개되는 언어의 측면에 비유하자면 이 모서리 부분의 표정은 다변(多辯)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완성된 작품의 표면이 가져다 주는 침묵의 깊이에 비쳐볼 때 다소 수다스럽다. 일견 모서리 부분의 이 다채로운 시각적 효과는 물체의 정면에서 보이는 단일한 색채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모서리가 둥글게 마감 처리된 두꺼운 이 물체 위에 입혀진 물감의 층이 수십 차례의 반복적 행위로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증표들이다.
물감이 때로는 인체에 치명적이기 때문에 방독면을 쓴 채, 비닐로 장막을 친 밀폐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분사(噴射) 작업은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몸을 쓰는 대부분의 극한작업이 대개 그렇듯이, 작업을 하는 순간에는 몰입도 있지만, 갖가지 상념도 따르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예술작품이 인생의 한 축도라는 사실은 영원한 진리일 것이다. 작업을 하는 동안 한 작가의 인생이 실려 오는 것이다. 장승택은 “인생이 공포스럽다”고 말한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마크 로스코(Mark Rothko)는 붉은 색의 추상화를 그린 뒤 스스로의 삶을 마감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그림을 보고 슬픔을 느낀 방문객에 대해 제대로 봤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세상에, 두세 가지의 색깔로 칠한 담백한 추상화에서 슬픈 감정을 느꼈다니! 그렇다면 장승택의 단일한 색의 오브제에서 삶의 공포를 느낄 법도 하지 않은가?
장승택의 오브제 회화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육체성, 다시 말해서 ‘몸성(Mom-sung)’은 그의 회화가 지닌 깊이감에서 온다. 그의 오브제는 정신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그 고통스럽고 지난한 작업을 연약한 신체가 직접 수행했다는 점에서 보면 지극히 육체적이다. 하지만 반복적인 육체노동을 통해 형성된 물감의 적층에는 마음의 연금술적 작용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작용에는 필연적으로 꿈을 꾸는 행위가 수반된다. 다시 바슐라르를 인용하면,

“세계를, 세계의 운명을 확대시키고, 불꽃의 운명에 대하여 명상함으로써 몽상가는 언어를 확대시킨다. 그는 세계의 미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범미적(汎美的) 표현에 의해 심령 자체가 확대되고 높아지는 것이다.”

바슐라르가 말한 것처럼, 장승택의 작업은 몽상의 산물이다. 그가 반복적으로 스프레이 작업을 수행할 때, 그는 때로 몽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이런 은밀한 행위를 바슐라르의 언명에 빗대자면, 그는 색의 운명에 대하여 명상함으로써 자신의 언어를 확대시킨다. 그는 “세계의 미를 표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장승택은 마음에 드는 여러 가지 색을 겹쳐 분사하는 반복적 작업을 통해 물질 속에 마음을 용해시킨다. 물감의 용액이 분무를 통해 기화되고, 기화된 물감의 입자들이 물체의 표면에 정착하여 굳어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화학적 작용이 작가의 마음의 분신에 다름 아님은 예술작품이 지닌 신비한 성격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마음의 연금술’적 측면인 것이다.

Ⅲ.
장승택의 작업에서 빛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그가 작품의 바탕이 되는 사물(objet)로서 빛이 투과되는 투명한 플랙시글라스를 선택한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단색화에 대한 장승택의 태도는 1세대 단색화 작가들이 지향하는 자연주의적 입장에 두어 지는 것이 아니라, 삶과 이상, 현실과 이상 사이에 개재하는 이율배반 속에 놓여 있다. 빛은 이른바 초월적 가치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써 고단한 삶과 현실 사이에 개재하고 있는 갈등에 대한 유비로 작용한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평론가인 장 루이 페리에(Jean-Louis Ferrier)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장승택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지된 상태에서의 영혼과 이를 바라보는 작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각각 나타나는 외관과 빛의 감성이 절제를 통해 표현된다. 빛에는 감각적인 요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감과 지성을 함께 포괄한다. 즉 생명, 죽음, 존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빛은 일상에서 보는 평범한 빛이기도 하고 작품을 통해 전개되는 특수한 빛이기도 하다. 형태 안에서 섬광을 기초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빛은 현실을 사로잡는다. 바로 이것이 장승택의 화면에 나타나는 물질과 영혼인 것이다.”

다시 바슐라르의 잘 알려진 용어를 빌면, ‘물질적 상상력’은 빛을 통해 존재의 기반을 얻게 된다. 회화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빛은 인간의 눈이 사물을 하나의 사물로서 인식하게 해주는 매개물이다. 만약 세상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사물을 사물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되 없는 것이나 같다. 그러나 빛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사물이 존재함을 인식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슐라르가 말한 ‘물질적 상상력’이란 곧 ‘물질적 요인에 생명을 부여하는 상상력’인 것이다.
장승택이 불투과성 사물인 캔버스를 택하지 않고 플랙시글라스라는 투명한 사물을 택한 이유가 바로 이 물질적 상상력 때문이 아닐까? 그것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물론 개인적인 취향에 기인한 것이긴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생명을 부여하기에 가장 적합한 물질이라는 판단이 앞섰던 것은 아니었을까? 따라서 그가 차용한 연금술적 상상력은 플랙시글라스라는 투명한 물질을 통해 투과된 빛이 그 위에 축적된 미세한 아크릴 물감의 입자들 간에 벌어지는 내밀한 화학적 반응을 유도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정면에서 볼 때는 단색화에 분명하지만, 사각의 모서리가 둥글려진 물체의 옆면에는 매혹적인 투명한 색채의 다양한 흔적들이 잔존하게 되는 것이다. 장승택이 두꺼운 물체의 측면을 자기 작업의 중요한 요소로 강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경우, 물체의 측면은 기존의 회화적 관습(pictorial convention)에 따라 불필요한 작품의 일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회화의 한 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빛의 역할과 관련하여 장승택의 작업에서 또 하나 주목해 볼 것은 그가 사용하는 반투명 매체인 플랙시글라스의 성질이다. 주지하듯이 플랙시글라스의 반투명성은 캔버스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색을 단지 표면에 고착된 색료로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빛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하나의 현상으로 여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장 루이 페리에가 그의 작업을 ‘물질과 영혼’의 관계로 파악한 진의가 아닐까? 그가 “빛에는 감각적인 요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감과 지성을 함께 포괄한다. 즉 생명, 죽음, 존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을 때, 빛은 물질과 영혼의 사이를 매개하는 가교의 역할을 하는 바, 이는 서양 중세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보는 것과 같다. 장승택은 숭고한 느낌을 주는 보라색(violet)을 자주 사용하는데, 마크 로스코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또한 영성(靈性)의 표현과 관계가 있다.

Ⅳ.
물질적 상상력에 기초한 장승택의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사물의 사물성(objecthood) 이다. 그의 작품은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사물의 덩어리에 의존한다. 붓질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얇은 캔버스의 천마저 거부하는 그의 작업은 그런 이유에서 철저히 반(反)회화적이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레진, 두꺼운 아크릴판, 플라스틱 판재, 플랙시글라스와 같은 재료들은 그의 반(反)회화적 정신을 잘 구현해 주는 매체들이다.
장승택의 사물로서의 물체들은 중성적 지대에 위치한다. 색채가 그렇고, 단일한 괴체(mass)로서의, 회화와 조각의 사이에 위치하는 사물의 성격이 그렇다. 그것을 회화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조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주지하듯이 현대미술 작품의 어떤 것은 이미 그 무엇으로 불리우기를 포기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그의 성격이 모호한 물체를 가리켜 ‘중성적 사물(neutral objet)’로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이리라.
여기서 다시 물질적 상상력의 입장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통찰력 있는 견해를 참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인간의 몽상은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것임을 느낄 수 있다. 가령 강이 흐르는 곳에서 태어난 사람은 물에 의해 그의 무의식이 지배되며, 그의 어린 시절의 꿈도 물이라는 원초적 사물에 의해 물질화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고향이란 하나의 영역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의 물질이다. 이러한 물질로서의 고향에 연결되어 있는 인간은 결국 편애하는 하나의 이마쥬, 하나의 원시적인 감정, 근원적으로 몽상적인 하나의 기질에 지배당한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장승택 작업의 탯줄은 감각이라고 불러도 좋을, 근원으로서의 어떤 물질과 연결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다음과 같은 진술을 음미해 보자.

“회는 부드러울수록 좋다. 나의 혀끝은 그 부드러움에 잘 길들여져 있다. 회는 또한 투명할수록 좋다. 부드럽고 투명한 욕망의 회뜨기.....그러나 이처럼 부드럽고 투명한 욕망의 자양분을 섭취한 나의 의식은 그만큼 독선적이고, 이유 없는 공격성을 띄기도 한다. 분노와 냉소의 냉, 온탕을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린다.”

“두려움과 호기심, 이 모순된 이중구조 안에서의 회뜨기, 이것이 나의 진정한 작업행위의 의미인 것이다.”

“나는 꿈꾼다. 너의 자궁 안에서 질식하고 완전히 침묵하기를.”
-장승택, <작업노트> 중에서-

장승택의 작품에서 맡아지는 이 ‘투명한 욕망’의 감각은 사실 그의 작업 전체를 관류하는 미적 특질이다. 이른바 사물의 중성성과 함께 투명하고 부드러운 감각의 영역에 속하는 그의 자의식은 욕망의 거처로서의 물질을 통해 밖으로 드러난다. 그러할 때, 그가 사용하는 다양한 색채들은 자의식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길어 올리는 다채로운 욕망의 상징으로 대변된다.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두려움과 호기심이 자아내는 심리적 방어 기제의 이중주로써, 분노, 냉소, 독선, 공격 따위의 비열한 감정들을 말끔히 소멸시킬 수 있는 침묵의 도피처를 간절히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동인이 된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이 공포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한다면, 그가 갈 곳은 “너의 자궁 안”이고, 그가 할 일이란 그곳에서 “질식하고 완전히 침묵하는” 것 뿐이다. 그 침묵의 대리인이 바로 우리가 그의 작품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마주하게 되는 단색의 화면인 것이다. 그 이차원 공간은 공포의 공간일 수도 있고 보기에 따라 환희의 공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개인적인 감각과 기억, 경험, 물질적 상상력을 단색의 표피 밑으로 매장한 채, 어떤 미의 보편적 지점을 향해 가려는 그의 의지를 확인하는 일일 것이다. 그는 “가장 개인적인 내적 욕망과 감성의 표현이 가장 보편적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지나치게 크거나 초월적인 것은 느끼지 못한다는 자명한 사실은 경험의 한계를 말해주는 사례이다. 가령 우주나 대서양의 크기는 경험적으로 가늠할 수가 없다. 바슐라르는 “한 인간의 믿음, 정열, 이상, 사고의 형태를 파악하려면 그것들을 지배하는 기본적 사원소, 즉 물, 불, 공기, 대지 가운데 어떤 물질의 한 속성으로서 다루어야 한다.” 고 말한다. 장승택의 경우 그것은 불이다.

“나의 작업의 대부분은 불과 열에 의해 만들어진다. 4원소(물, 불, 공기, 대지) 중에서 불만큼 두려움과 호기심의 상상력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원소는 없다.....인간의 불의 발견은.....익힌 음식문화를 갖게 하였다. 그것은 부드러움의 문화이다. 모든 사물을 연소, 변형, 소멸시킬 수 있는 불의 힘과 시각적인 강렬한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는 순수성!”

“한여름 밤 축제의 장작불 앞에서, 긴긴 겨울밤 따뜻한 화롯불 앞에서 그리고 사색의 촛불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꿈들을 키워 왔던가? 그 앞에서 느껴지는, 수세기를 달려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듯한 ‘내적 울림’의 보편성. 이 보편적 내적 울림의 원형을 찾아 쌓는 행위가 곧 나의 작업인 것이다. 태우기, 그을리기, 끓이기, 녹이기, 흘려 붓기, 굳히기, 또 다시 녹이기....”
장승택 <작업노트> 중에서

위의 진술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장승택의 작업을 통한 감각적 행위는 곧 ‘내적 울림’의 상호 소통을 위한 몸의 언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어떤 지점을 상정한다. 그의 신체 언어(Mom-sung)가 지닌 원형성은 시공을 초월한 어떤 지점과 맞닥뜨리길 희구한다. 이른바 보편성이란 이름의 그것을 찾기 위해 그가 기울이는 다양한 행위들-태우기, 그을리기, 끓이기, 녹이기, 흘려 붓기, 굳히기, 또 다시 녹이기 등등-은 잃어버린 꿈을 찾기 위해 인류가 기울이는 문화의 원형적 지표들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불에 의해 연소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물질적 상상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만일 ‘마음의 연금술’로서의 장승택 작업이 의미를 지닌다면 바로 문화의 이러한 측면에서 일 것이다.

윤진섭(미술평론가/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Yoon Jin Sup(art critic/honorary professor at Sydney College of the Arts, The University of Sydney)